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우옌 왕조 (문단 편집) === 응우옌 가문 === 응우옌 가문은 16세기 이래 베트남 북부의 탄호아 지방을 다스리는 유력 가문이었다. 응우옌 가문은 옛날부터 베트남 일대에서 꽤나 힘을 쓴다고 널리 알려져 있던 대귀족 가문이었는데, 965년에는 [[딘 왕조]] 아래에서 재상직을 맡기도 했고 [[레 왕조]] 시기인 1442년과 1453년 사이 동안에는 섭정직을 맡아 어린 황제 대신 베트남을 대신 통치할 정도로 그 권세가 높았다. 1527년 막 가문의 [[막당중]]이 [[레 왕조]]의 [[공제(레)|공황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여 황제에 즉위하자, 레 왕조에 충성을 유지하던 응우옌 가문과 찐 가문은 이에 반감을 품고 막 왕조를 거꾸러뜨리기 위한 반란을 모의했다. 찐 가문과 응우옌 가문은 탄호아 지방에서 반란군을 일으켰으나 얼마 가지 않아 진압당해 인근의 란쌍 왕국으로 도망쳐 일시적으로 세를 추슬렀다. 당시 반란군들을 이끌던 응우옌 가문의 [[응우옌낌]]은 레 왕조를 추종하던 자들을 모아 반란군의 세를 불렸으며 1540년에 다시 돌아와 탄호아 지방을 수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응우옌 김은 1539년에 레 왕실의 [[레장종|장종]]을 복위시켜 [[후 레 왕조|중흥 레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레 왕실은 유명무실한 꼭두각시였고, 실질적인 권력은 모두 찐 가문과 응우옌 가문에게 나뉘어져 있었다. 레 왕조를 복원한 찐 가문과 응우옌 가문은 북쪽에 잔존하고 있던 막 왕조와 대립각을 세우며 베트남의 남북조 시대를 열었다. 이미 내분이 일어나면서 망해가던 막 왕조였기에 레 왕조의 복귀는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레 왕조 내부에서도 물밑다툼이 굉장히 치열하던 시기였다. 응우옌 가문과 찐 가문은 대대로 내려오는 라이벌 관계의 가문들이었고, 도저히 양립할 수 없었던 관계였던 것이다. 결국 응우옌낌의 양자이자 찐 가문의 일원이었던 [[찐끼엠]]이 응우옌 김의 장자인 [[응우옌우옹]]을 독살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차남 [[응우옌호앙]]은 찐끼엠에게 남부 변두리의 광남 지방으로 분봉받게 해 줄 것을 요청한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라고 여겼던 응우옌호앙이 알아서 남부 지방으로 처박혀 준다니 찐끼엠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고, 응우옌호앙도 일단 목숨을 건져 남부에서 힘을 키울 생각이었기에 찐끼엠은 이름뿐인 황제에게 요청하여 응우옌호앙을 광남 지방의 책임자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레 왕조의 세력구도는 크게 베트남 북중부를 중심으로 하는 [[찐씨 정권]]과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응우옌씨 정권]]으로 나뉘어지게 된다. 당연히 남쪽으로 내려가 찐 가문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진 응우옌호앙은 [[하노이]]에 있는 찐끼엠에게 충성을 다할 마음이 없었고, 레 왕조의 황제에게 형식적인 충성을 유지했을 뿐 조공을 바치거나 세금을 따로 걷어 중앙정부에 납부하지도 않으면서 사실상의 독자정권을 이루었다. 응우옌씨 정권은 끊임없이 남쪽으로 정복작업을 벌이면서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삼고 [[라오스]]를 침공했고 [[참파]]의 잔존 세력들을 1693년에 완전히 복속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런 와중에도 북쪽에 도사리고 있는 찐씨 정권에 대한 적대 관계는 유지하면서 17세기 전반에 걸쳐서 약 100여 년간 레 왕조에서는 한 나라 안에 두 개의 왕국이 있는 것 같은 세력 구도가 팽팽하게 유지된 상태였다. 이러한 대치 상황은 응우옌씨 정권에서 과도한 징세와 수탈에 반발하여 1774년 [[떠이선 농민 운동]]이 일어나면서 깨진다.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서 엄청난 국력을 쏟아부어야 했던 응우옌씨 정권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찐씨 정권에서 농민봉기군과 합세해서 북쪽에서부터 밀고 내려오자 응우옌씨 정권은 무너질 징조를 보였다. 1775년에는 수도인 [[후에]]가 함락당했고, [[응우옌반냑]]이[* 원래는 세금을 걷던 세리로, 응우옌 성씨를 가지기는 했지만 남부를 다스리던 응우옌 가문의 일원은 아니다. 베트남에서 응우옌 성씨는 한국의 박석김에 비슷할 정도로 엄청나게 흔한 성씨다.] 응우옌 가문의 응우옌푹투언과 [[응우옌푹즈엉]] 등을 모두 몰살시켜 버렸고, 1777년 경에 남쪽으로 도망가 요새를 지어 버티고 있던 잔존세력들마저 모두 처형하고 응우옌 가문의 씨를 말리는 데에 성공하면서 응우옌 가문은 완벽히 몰락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